시작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인 레프 야신은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혁신시켰고 소비에트 연합의 영웅이 되었다. 이번 여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사진을 보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야신이 2018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적인 스타이며 항상 검은색 옷과 편평한 모자를 쓰는 스타일로 유명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어린 시절은 전쟁에 의해 파괴됐으며 은퇴한 후에는 다리를 잃게 할 만큼 심각한 전염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60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발렌티나 티모피브나 야시나는 의자에 기댔다. 그녀는 역사상 최고의 축구선수 중 한명인 자신의 남편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뒤, 유리 캐비닛 맨 위 선반에는 1963년에 야신이 받았던 발롱도르가 있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긴 했지만 여전히 금색이었다.
발롱도르를 수상한 유일한 골키퍼였던 레프 야신은 6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1년 후인 1991년에 무너진 소비에트 연합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블랙 펜서, 블랙 스파이더였으며 그녀가 남편과 보냈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거실만큼 눈앞에 있는 듯한 곳은 없었다.
발렌티나는 현재 88살이며 1964년에 국가가 제공한 아파트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벽을 훑어보니 야신이 친구들, 가족들과 찍었던 사진들이 있었다. 축구계 동료였던 프란츠 베켄바우어, 펠레, 에우제비오뿐만 아니라 두 딸과 손자 손녀들도 있었다. 복도에는 수십개의 메달들이 빨간 줄에 걸려있었다.
담배 연기가 천천히 부엌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발렌티나는 상대방을 편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장난기 넘치는 웃음을 가지고 있으며 눈은 반짝 빛났다. 이제 그녀는 앞쪽으로 기대면서 우리가 이야기를 듣도록 했다. 이 이야기는 한 명의 아빠, 골키퍼였으며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위해 뛰었던, 모든게 현재와 달랐던 그 때에 관한 이야기다.
골키퍼를 재발견하다
모스크바에 위치한 발렌티나의 아파트에 있는 푹신하면서도 두꺼운 정문을 지나 걷다 보면, 여러분은 축구 레전드의 일대기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보는 모든 곳에는 포스터, 트로피, 사인이 있는 축구공들이 있다. 이것들은 전설적인 커리어동안 모았던 많은 개인적인 물품들이었다. 이 곳은 26년동안 야신이 살았던 곳이었다.
너무나도 많은 기념품들이 있어서 따라가기 어려웠다. 소파에는 사자 인형이 있다. (러시아로 Lev 는 사자를 의미한다.) 입스위치 타운의 우승기도 있다. (발렌티나는 그게 어떻게 야신에게 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얻었던 금메달도 있었는데 이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우승 축하 기차 여행에서 수없이 많이 사람들이 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컬렉션에는 중요한 하나가 빠졌는데, 바로 월드컵 메달이었다. 야신이 국제대회에서 가장 최고 순위를 기록했던 것은 1966년에 잉글랜드가 주최하고 우승했던 월드컵에서 기록한 4위다. 사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을 혁신시키고 가장 많은 상을 수상했던 그였음에도 월드컵에서 우승을 하지 못한 채 커리어를 마감했다.
1962년, 소련은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개최국인 칠레에게 2:1로 졌다. 당시 32살이었던 야신은 최고의 폼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막기 쉬웠던 두 골은 팀의 탈락으로 이어졌고 러시아어로 된 경기 보고서는 그를 희생양으로 그렸다.
팀이 남미에서 돌아왔을 때, 화난 서포터들이 공항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야신 은퇴해라", "네 집으로 돌아갈 때"와 같은 걸개가 걸려있었다. 야신 집의 창문은 깨졌고 차에는 모욕적인 말들이 적혀있었으며 우편함에는 협박 편지들이 있었다. 그는 이 때를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말했다.
그거를 어떻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야신은 1960년에 유럽 챔피언십 (지금의 유로) 결승에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팀을 막고 동료들이 추가시간에 결승골을 넣어 우승했던 그 때에 영웅이 되었다. 칠레전 이후, 발렌티나는 남편이 그렇게 우울해보였던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말 은퇴하고 싶어했어요," 발렌티나가 말했다. "레프가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의 이름이 불러지자마자 야유를 했어요.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고 조롱했죠. 모두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경기를 진게 팀 전체의 잘못이 아니라 오직 그의 잘못이라고 했죠. 경기 리뷰를 썼던 기자는 스포츠에 대해 몰랐습니다. 그의 직업은 원래 남미 정치에 대해 쓰는 기자였어요."
언론들은 뇌진탕임에도 뛰었던 것, 나머지 팀 동료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하고 오직 레프에 대해서만 기사를 썼어요. 자고 있다가 골을 먹혔다고 말했죠.
그러나 노력 끝에 성공을 거머쥐었던 야신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쳐나갈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커리어 초반, 18세의 나이로 금속 공장 팀에서 뛰었을 때 야신은 실패로 고통받았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좌절이었냐고? 잘 모르겠다. 수년동안 쌓였던 피로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내 안의 무언가가 갑자기 부서졌다. 그 때 나는 공허함밖에 느끼지 못했다." 미래에 전설이 될 그는 일하는 것을 그만뒀다. "법적으로 나는 무단결근이었죠." 그리고 스포츠에 대한 의지 역시 잃었다.
공장 팀의 한 친구가 군대에 지원하는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야신은 그것을 그의 "구원"이라고 불렀다.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군인으로써 축구를 하면서 야신은 축구 경기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다시 찾았고 훈련에 훨씬 더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바로 전직 축구 선수이자 아이스하키 선수였고 디나모 모스크바의 유소년 코치인 Arkady Chernyshev의 눈에 띄었다. 계약하고 4년이 지났던 1953년까지 야신은 디나모 1군의 신뢰받는 선수가 되었다.
뿐만 아니랴 야신은 재능있는 아이스하키 골키퍼였고 1953년 3월, 소비에트 컵을 우승했다. 이것이 그의 첫 메이저대회 우승컵이었다. 물론, 그 해 10월 축구에서 또 우승컵을 들긴 했다. 야신은 축구와 아이스하키 모두 수준급의 선수였고 1954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축구로 영원히 전향하였다. 그는 4번의 월드컵에 출전했고 조국이 두 번의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도록 도와줬고 페널티킥에서 150개의 선방을 기록하며 그의 명성은 전세계적인 수준으로까지 높아졌다.
야신은 스포츠맨십과 겸손, 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로 알려졌다. 2014년에 세상을 떠난 前 잉글랜드 국가대표 공격수 톰 피니 경은 1958년 월드컵 때 그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하던 때를 회상했다. "나는 내 약발로 공을 차려고 마음 먹었어. 왜냐하면 내가 왼발로 몇번 페널티킥을 하는 걸 봤다는 걸 알았거든. 긴장했냐고? 당연하지! 슛을 준비하려고 뒤를 돌았을 때 내 팀동료들 몇명은 등을 돌렸어. 차마 볼 수가 없었거든."
내 기분을 상상해봐, 근데 골을 넣었어! Great Yashin을 상대로 넣었다고!
발렌티나는 칠레전 이후 자신을 의심했던 사람들에게 실력을 증명한 날을 잘 기억하고 있다.
1963년 10월 23일, 야신은 런던 웸블리에서 잉글랜드 축구협회 100주년 기념을 축하하기 위한 특별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전세계 베스트 11 멤버로 뛰고 있었다. 그녀는 라디오 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모스크바에 위치한 중앙 라디오 위원회 빌딩에 있는 큰 화면으로 경기를 봤다.
야신은 불과 1년전, 소련을 이겼던 칠레 감독인 세계 베스트 11 감독, 페르난도 리에라에게 선택받았다. 그는 전반전만 뛰었고 몇 개의 미친듯한 선방을 보여주었다. 하프타임 때 0-0이었고 유고슬라비아의 Milutin Soskic가 후반전에 교체로 들어갔다. 경기는 2:1, 잉글랜드의 지미 그리브스가 90분 결승골을 넣음으로써 잉글랜드의 승리로 끝났다.
발렌티나는 학교와 유치원에서 딸들을 픽업하며 집으로 가는 택시 안을 회상했다. "운전자가 저에게 말하더라구요, '런던에서 열렸던 경기 들었어요? 우리 팀이 1등했어요,'" 그녀가 말했다. "'무슨 소리에요?' 대답했죠. '2:1로 끝났는걸요,' '아, 그게 중요한게 아니에요. 야신이 전반전에 뛰었는데 하프타임 때 교체될 때까지 0-0이었어요.'
"이게 모스크바 사람들의 반응이었어요. 모든 팬들이 그를 다시 찬양하기 시작했죠."
1963년 12월, 야신은 지금도 전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그 시즌, 야신이 뛰었던 디나모는 다섯번째 리그 우승컵을 거머쥐었고 야신은 27경기에서 7골밖에 실점하지 않았던, 커리어 역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를 보냈다.
발렌티나는 그것을 축하하기 위해 따로 특별한 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나중에 마지못해 말하면서 집에서 너무 화려하지는 않았던 특별한 저녁을 먹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야신의 명성은 다시 회복했다.
지금도 발롱도르를 수여하고 있는 잡지인 프랑스 풋볼은 야신이 "골키퍼의 역할을 혁신시켰으며 항상 또 한명의 수비수로 뛸 준비가 되어있다. 그의 포지셔닝과 빠르게 공을 던짐으로써 위험한 역습의 시발점이 된다." 라고 적었다.
우리는 이를 2014년에 독일이 월드컵을 우승했을 때 '스위퍼-키퍼' 역할을 했던 마누엘 노이어를 떠올릴 수 있다. 다른 선구자, 특히 헝가리의 Gyula Grosics와 같은 다른 선구자가 그에게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골키퍼도 야신만큼 기억에 남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Yevgeny Yevtushenko가 그에 대해 썼던 시의 첫 문구는 다음과 같다: "이제 축구의 혁명이 있네/ 골키퍼가 그의 라인을 달리면서 벗어나네"
역사에서 야신의 위치는 확고했다. 오늘날 그의 얼굴, 편평한 모자, 뻣뻣한 검은 소매를 러시아 월드컵 포스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야신은 한 명의 전설이 되었다. 그의 아이콘이었던 모자가 1960년 유러피언 챔피언십 결승전 도중 난입한 관중에게 뺏기면서 모자를 다시 쓰지 않았고 (발렌티나는 그저 그가 다른 모자에 적응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유명한 검은색 상의는 사실 어두운 파란색이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야신은 한 명의 골키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는 소비에트 골키퍼였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러시아에서, 골키퍼는 국경이다. 그리고 야신이 국경에서 자랄 때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었다.
(2부에서 계속)
출처 : BBC -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