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링크
The Border
발렌티나가 말했다: "골키퍼가 하는 어떤 실수든 모든 사람들이 그 실수를 볼 수 있어요. 그걸 기억하죠. 계속해서 그 실수를 말하구요. 골키퍼는 매 경기마다 마지막 라인에 서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많은 긴장으로 고통받습니다. 만약 그 라인이 뚫리면, 골이 되는거죠."
야신의 아내는 그의 글러브를 맞고 굴절되어 먹히거나 손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슈팅을 생각하며 침대에서 뒤척이느라 잠을 못잤던 밤들을 되돌아봤다. 팀이 승리했던 날이라도 그의 밤은 똑같았다. 왜냐하면 한번의 실수라도 항상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골키퍼가 축구에서 특이한 포지션이고 러시아에서는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발렌티나만이 골라인을 하나의 '경계'와 비교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또다른 사람은 예술가인 Aleksandr Rukavishnikov다. 모스크바에는 야신의 기념비가 많은데, 그 중 두개의 동상은 그가 만들었다.
Rukavishnikov는 축구팬은 아니지만, 야신의 팬이다. 왜일까? "그는 국가적인 영웅입니다. 축구때문이 아니라 성격때문에요. 정말 멋진 사람이었어요."
그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성공의 상징입니다. 그는 골키퍼고, 골키퍼는 하나의 국경과도 같죠. 모든 것을 막는 수비수 말이에요.
야신이 어렸을 때 정말 그 국경이 뚫린 적이 있었다.
1929년에 태어난 그는 1941년 가을, 나치가 수도에서 7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을 때 가족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탈출했다. 당시 레닌그라드라고 불렸던 러시아의 두번째 도시, 상트페테스부르크는 포위당했고 식량은 이미 바닥나고 있었다.
역사상 가장 치명적이었던 이 포위는 872일간 지속되었고 75만 명의 시민들이 죽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가죽 벨트를 수프에 넣어 끓여 먹었다. 사람을 먹기도 했다. 사람이 먹지도, 손대지도 않았던 쥐들조차 굶어 죽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야신은 11살의 나이에 그와 그의 가족들이 모스크바 동쪽으로 800km 떨어진, 아버지가 일했던 군수공장이 이전할 만한 안전한 곳으로 선택한 Ulyanovsk에 도착했을 때 어린 시절이 끝났다고 서술했다. 그 당시 야신은 13살이 됐으며 총알을 만드는 일을 공장에서 했었다.
그가 말했다: "우리 세대의 소년 소녀들은 빵을 밝기 위해 줄을 섰고 맨 앞에서 설탕 한 덩어리를 받는 일종의 승리를 꿈꿨다. 우리가 빵을 받을 때까지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었다."
그들은 공장을 다시 짓고 가동하기 위해 눈을 뚫고 기계를 끌었다. 음식은 이웃마을에서 왔는데, 썰매 뒤에 매달고 12km 떨어진 집까지 끌고 갔어야 했다.
결국, 나치는 후퇴했다. 1944년이 돼서야 "전방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캠프 전체에 퍼졌다는 행복한 루머"가 사실로 밝혀졌고 모스크바는 다시 한번 안전해졌다. 야신과 그의 가족은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곧 끝나는 참이었다.
"전쟁에서 우리는 다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배웠다." 그가 적었다. "우리는 단지 두려움 때문에, 약속 때문에 일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양심을 위해 일하고, 뼈빠지게 일하는 법을 배웠다. 우리가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들기 위해 경쟁했을 때 우리는 우승이 가져올 보상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축구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다른 나라를 보면 가장 존경받는 축구선수들이 주로 공격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드필드의 사령관, 등번호 10번, 혹은 날카로운 중앙 공격수. 야신은 수비의 최후의 보루를 지키는, 궁극적인 수문장, 골키퍼였다.
지구에서 가장 큰 나라인 러시아는 복잡한 곳이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며 자랑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국 침입자들에게 수복당했던 전쟁의 경험은 러시아에서 왜 골키퍼가 다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모스크바의 Tretyakov 갤러리로 가면 여러분은 Aleksandr Deineka의 1934년作 "The Goalkeeper"를 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은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영웅적인 모습을 그려냈다. 아니면 Sergei Grigoriev가 1949년에 그린 무릎에 붕대를 감고 웅크려있으면서 부서진 땅 위로 골을 막으려는 어린 소년을 볼 수 있다. 제목이 뭐냐고? "The Goalkeepr"다.
1936년 소비에트 영화 "The Goalkeeper"에서 주인공은 페널티를 막고 마치 파시스트의 적과 닮은 모두 검은색으로 덮인 가상의 세계 팀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기까지 한다. 코미디 뮤지컬이었던 그 영화의 마지막 노래는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온다:
골키퍼, 전쟁 준비를 해줘. 당신은 문지기잖아. 당신 뒤에 최전방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해봐.
야신은 고통과 희생으로 처음에 힘들게 시작했지만 20세기의 거인으로 자랐으며 특히 소비에트가 잘 나가던 때에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마지막은 비극으로 가득찼고 심각한 건강 문제로 뒤덮였다. 다리 절단으로 인해 목발에 의존해야 했던 심각한 질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다.
비극적인 결말
야신이 선수 생활을 그만둔건 41세의 나이였다. 발렌티나가 말했다. "41살도 많이 뛴거죠." "저는 그의 마지막 경기들 중 한 경기에서 공을 막으려고 다이빙했는데 계속 그 자리에 누워있던 걸 기억해요. 그 때 생각했죠. '다친거 아냐?' 그는 뇌진탕만 세 번을 당했는데 병원에 갈 때마다 3일씩 입원했고 또다시 뇌진탕이 왔다고 생각했죠."
"그는 그 자리에 누워있었고 일어나지를 않았어요.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서 공으로 다시 가더라구요. 공을 앞에 있는 선수에게 던지고 나서 다시 평소처럼 뛰었습니다. 집에서 물어봤죠. '왜 일어나지 않았어요? 걱정했잖아요. 제 주변 사람들도 걱정했단 말이에요.' 그가 말했어요: '그냥 많은 걸 바라지 않았어. 잔디가 그날 따라 너무 냄새가 좋더라고. 그냥 정말 일어나기 싫었어. 그게 다야.'"
발렌티나의 거실에 계속 있는동안 전화가 세번 울렸다. 그녀를 찾고 있던 것이다. 러시아의 다큐멘터리 기자가 자신들의 프로그램 제목을 '야신: 전설' 혹은 '야신:영웅' 둘 중에서 어느 게 더 낫는지 알고 싶어했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의 평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녀가 계속되는 프로포즈에도 처음에 왜 결혼을 주저했는지, 결국 모스크바의 가게에서 프로포즈를 받았는지도 이야기했다. 다리 절단으로까지 이어졌던 그의 심각한 건강 문제로 고통 받았던 그의 말년에 대해서도, 두 번의 심장마비, 두번의 뇌졸증도 이야기했다. 같이 모스크바 공장에서 일했던 평생 친구들이 썰매를 만들어줘 겨울마다 그들과 함께 얼음 낚시를 계속 한 것도 말했다.
야신은 은퇴하고 난 후 대부분의 시간을 발렌티나가 제2의 열정이라고 불렀던 낚시를 하는 데 보냈다. 그러나 항상 건강이 문제였다. 선수로 뛰던 중에도 발렌티나가 꾸짖었던 전쟁 중에 음식을 별로 먹지 못해 발병한 만성 위장염으로 고통받앗다. 또한, 생전에 담배를 정말 많이 폈다. 13살에 시작한 담배를 끊을 수 없다고 느꼈다.
"전 그를 할 수 있을만큼 응원했지만, 어떤 사람도 그들이 고통받는 걸 보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발렌티나가 말했다. "건강은 건강이에요. 축구는 스포츠죠. 스포츠는 일이구요, 그것도 힘든 일이요. 때때로 그는 조금 우울해보이기도 했어요. 갑자기 걷는 것이 어려워졌죠. 그게 첫번째였어요. 그 다음에는 위염, 심장마비, 그리고 뇌졸증까지. 물론 이것들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죠. 하지만, 그는 바뀌지 않았어요."
1989년 10월 22일, 야신의 6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디나모 모스크바는 특별 경기를 열었다. 소련 전국에 걸쳐 (모스크바, 밍스크, 키예프, 치빌리시) 디나모 클럽에서 뛰는 선수들로 구성된 팀과 전세계 베스트 11 팀과의 경기였다. 작별인사를 할 때였다.
디나모 모스크바에서 같이 뛰었던 Anatoliy Korshunov는 야신이 "이미 모든 것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위암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헝가리로 가던 중에 발생한 혈전으로 이미 5년 전에는 무릎까지 다리를 절단했다.
예전 디나모 스타디움에서 에우제비오, 바비 찰튼, 베켄바우어가 경기를 뛰었다. 야신은 그의 팀에서 아내인 발렌티나와 경기를 봤다.
경기 후, 오픈카가 그를 태워 운동장 트랙을 돌았다. 그는 뒷자리에서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목발에서 자유로운 채로 경기장을 돌았다. 그 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차가 몇 바퀴를 돈 후 멈췄고 언론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초대 받은 사람들, 선수들, 팬들이 모두 그를 환영하기 위해 다가갔다. 모두가 한번씩 안을 때마다 따뜻함과 슬픔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 당시는 체르노빌 사태가 일어난지 3년 후였다. 또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한달 전이었다. 소련의 모든 국가들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야신은 1971년에 은퇴했다. 이미 소련은 '채식주의자의 시기'로 알려진 Leonid Brezhnev 아래 경제적인 침체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채식주의자란 단어는 조셉 스탈린의 '육식성의' 역할을 나타냈던 것과 정반대의 의미를 나타낸다.
Korshunov는 현재 77살이고 그의 오랜 친구에 대한 감정을 말하고 있다. 그가 16세의 나이로 디나모에 입단했을 때 야신이 그의 멘토가 되었는데 당시 나이차가 11살이었다.
오늘날, 그는 한 때 중앙 모스크바 맨션이었던 곳 구석에서 작은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 운영을 도와주고 있다. 바닥은 울퉁불퉁했고 높은 천장으로부터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는 옷깃에 소련 국기가 그려진 핀을 달고 있었다.
"그의 대단함, 권위, 세계적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야신은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Korshunov가 말했다. "전 정말 슬펐어요. 눈물이 흘렀죠. 왜냐하면 그렇게 세상을 떠나기에는 아까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으니까요."
만약 제가 그와 같은 사람은 다시는 없을거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돈에 단 하나도 관심이 없는 이런 종류의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제 그와 같은 사람은 없을거에요. 우리는 다른 시대에 살았어요; 완전 다른 시대였죠.
1990년 3월, 야신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마지막 상을 받았다. 사회주의자 노동의 영웅이라는 금색 별 훈장을 수여받았다. 지금 그 훈장은 복도에 걸려져있고 나는 발렌티나에게 아까 다큐멘터리 제작자에게서 걸려왔던 전화에 대해 물어봤다. 어떤 제목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웃었다. 그녀도 모른댄다. 그저 남편에 대한 수많은 똑같은 질문에 대답하느라 피곤하다고 말했다.
영웅인 것은 당연하지만, 아마 비극적인 영웅이었을까? "희비극적인 영웅이죠." 그녀가 말했다. 내가 왜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유머를 사랑했고, 이야기를 하고 농담을 하는 것을 좋아했으니까요. 비극적인 부분은 그 외 모든 부분입니다."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물론, 누가 이것을 기쁘다고 하지 않겠어요? 지금 당신이 나와 같이 있고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누가 즐기지 않을까요? 지금은 기뻐요. 자랑스럽게 느끼고 있어요."
발렌티나가 새로운 세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자부심과 슬픔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와 야신은 두 딸을 길렀는데 두 딸은 한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 총 세 명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었다.
발렌티나의 손자 중 한 명인 Alexander Yakovlev는 14살 때 자전거 사고로 머리를 부딪쳐 20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 또한 축구 선수였고, 그것도 골키퍼였으며 "사랑스러운 꼬마 소년" 이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의 두살 형인 다른 손자는 이미 프로로 뛰기 직전까지 갔었다. 야신의 이름을 물려받지는 않았지만 야신의 전설이 살아있다는 것을 곧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제 2의 야신을 찾으며
Vasily Frolov는 골키퍼를 하곤 했었다. 그는 야신이 유일하게 뛰었던 디나모 모스크바에 몸을 담기도 했었다. 그는 야신의 손자이며 현재 자신의 골키퍼 훈련 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할아버지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모스크바 북부에 위치한 Tyshino에 있는 경기장 근처에 위치한 스포츠 홀에 있는 현대적인, 인조잔디 경기장에서 만났다. 어떤 표지판도 없는 큰 12차선의 고속도로에는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의 새로운 경기장이 있는데, 이 곳은 곧 월드컵 경기가 열릴 곳이다.
Vasily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레프 야신 스타일" 이라고 적혀 있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4명의 소년들이 나타났다. 그는 어린 키퍼들이 꼬깔 사이로 뛰도록 했다. 그들은 완벽했다. 각 세션마다 레슨이 있었는데, 소통, 반사, 포지셔닝, 공 던지기 등을 가르쳤다.
Pyotr는 10살이다. 그는 모든 옷이 검은색이었고 글러브조차 검은색인 채로 나타났다. 다른 아이들도 그랬다.
다른 두 친구는 검은 반바지, 검은 속옷, 검은 긴팔 상의를 입고 있었다. Pyotr는 유튜브로 야신의 경기들을 봤고 그의 최고의 선방들을 봤지만 디나모를 응원하지는 않는다. 바실리에게 물어봤다. 그 검은 옷 꼭 입어야돼? 아니면 추천받은거야? "아뇨" 그가 대답했다. "그냥 저렇게 입고 왔던데요,"
바실리는 디나모 유소년 팀에 입단했다. 그저 집에 가깝다는 이유로 토르페도 모스크바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1군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1군에 진입하기 가장 가까웠던 적은 디나모 상트페테부르크로 임대를 갔던 때였다. 그 팀은 2부리그 소속이었고 23살의 나이에 은퇴했다. 바실리의 할머니인 발렌티나는 그가 썩 잘하지는 않았다고 솔직히 말했다. 바실리는 동의했고 더 설명했다. 그가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의 짐이 너무 컸단다.
"외부에서 거는 기대나 압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마음 속 압박이 너무나도 컸어요. 그런 분이 제 할아버지였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담스러웠죠." 그가 말했다. "모두에게 그만큼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높은 레벨이었어요. 실수를 할 때마다 더욱더 고통스러웠죠. 계속 하면 내가 미칠 것 같다는 걸 느꼈고 제 실력이 갈수록 떨어져서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다입니다."
바실리는 그의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것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4살 때, 그는 햇빛이 들어오는 침실로 걸어들어갔는데 키가 침대 매트리스만해서 야신이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봤다. 할아버지가 오라고 손짓해서 그의 다리 밑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가 말했다. "그때 할아버지가 다리 하나밖에 없었다는 게 기억나요. 그리고 반대쪽에 있어야 할 다리는 아예 없었구요. 하지만 그건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요. 그저 할아버지가 더 가까이 오라고 한 게 그냥 행복했어요. 저를 담요로 덮었는데 그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할아버지 옆에 있다는게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죠."
제가 유치원에 있었을 때조차 할아버지가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가 막 어렸을 때 우리 자식을 어떤 이름으로 할까? 와 같은 그런 말들을 했을 때 저는 제 아들을 레프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정말 그렇게 됐어요.
그가 말한 것처럼 꼬마 레프는 아직 축구에 대해 고민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다. 그것도 그런게 아직 네 살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이번 여름을 지켜볼 것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가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리고 오늘날 그를 여전히 존경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지켜볼 월드컵을 러시아는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야신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소련은 무너졌고 거의 30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여전히 살아있고 다가올 몇 주는 야신 가족에게 아주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다. 발렌티나의 아파트에서 창문이 열린채로 네 세대의 신발들이 문 앞에 놓여져있는 채로 말이다.
Lev Ivanovich Yashin
1929-1990
출처 : BBC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