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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가 얼마나 계속해서 성장할지와 상관없이, 제임스 깁슨의 유산은 기억되어야 한다

유나이티드 팬들은 제임스 W 깁슨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들은 제임스 W 깁슨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구원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맨유가 하나의 대기업이 된 지금, 그가 클럽에서 이룬 것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대단한 사업가였던 그를 과소평가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깁슨은 대출을 절대 갚을 수 없는 파산 상태였던 유나이티드를 구한 것뿐만 아니라 많은 일을 했다. 1. 그는 1930년대에 클럽에 환멸을 느낀 서포터들을 다시 돌아도록 설득시켰다. 2. 또한 클럽의 유소년 팀을 최초로 만들기도 했다. 3. 그리고 서포터들이 다른 도시에서 경기를 보러 오도록 올드 트래포드 기차역을 짓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4. 유나이티드의 훈련장을 최초로 만들었다. 5. 세계 2차대전에서 폭탄을 맞아 파괴된 구장을 다시 지었다. 6. 맷 버스비경을 감독으로 임명했다.

짓궃게 말하자면, 당신은 셰이크 만수르가 21세기에 시티에 한것처럼 깁슨이 20세기에 유나이티드를 위해 많은 것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월요일 체셔의 Hale Barns에 위치한 공원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의 믿음 (Manchester United Supporters' Trust)과 그의 친척들이 참석하는, 깁슨을 위한 공식적인 기념식이 열린다.

깁슨은 지금의 슈퍼-클럽인 유나이티드의 기반을 마련했다.

왜 예전도 아니고 지금 깁슨의 이야기가 중요하냐고? 지금의 슈퍼-클럽 유나이티드를 만들도록 기반을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왜 그가 그렇게 맨유를 살리고자 했는지도 중요하다. 그는 보상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그의 자손들 역시 보상을 받지 않았다. 이번주 토요일 맨체스터 더비는 수십억 파운드의 자본을 가진 미국 벤쳐 자본가들과 중동 석유재벌들의 맞대결, 조세와 펩의 맞대결, 수억명의 전세계의 관중들이 보는 경기이기 때문에 깁슨이 맨유에게 투자했던 과거는 항상 상기시킬만한 가치가 있다.

깁슨은 부자이기도 했지만, 단순히 축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는 스포츠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제공했던 맨체스터라는 도시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그랬다. 따라서, 시티가 맨체스터에서 더 강한 클럽이었을 때 깁슨은 유나이티드를 이끌기 시작했고 소박한 야망을 다음과 같이 보여줬다. "맨체스터에는 충분히 두 개의 훌륭한 축구 클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깁슨 (맨 뒷 줄 왼쪽)이 1935/36 시즌 유나이티드 선수들과 찍은 사진 CREDIT : REX

깁슨의 조카의 아들인 앨런 엠블링(78)은 1951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깁슨을 실제로 봤던 얼마 안되는 사람이며 그는 월요일 공식 기념식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주기만 했습니다." 앨런이 이번주 증삼촌 제임스와 제임스의 아내 릴리안에 대해 말했다. "그들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돈을 절대 빼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대함이 지금의 맨유를 만들었죠. 다른 사람들 모두 유나이티드에서 돈을 빼갔지만 깁슨은 절대 그러지 않기로 했죠."

엠블링은 어렸을 때 지금은 철거된 Hale Barns의 깁슨 가문 저택에 처음 방문했었다. 삼촌인 깁슨이 투병하고 있었을 때 갔었는데 이모인 릴리안이 옷장에서 FA컵 트로피를 꺼낸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한다. 유나이티드는 1948년 FA컵을 우승했지만, 올드 트래포드가 폭탄에 맞아 파괴되면서 깁슨이 소유하고 있던 맨체스터 시청의 추운 창고에는 차마 넣을 수도 없어서 트로피를 보관할만한 안전한 곳이 없었다. "제 이모는 옷장에서 천으로 둘러싸여있던 어떤 것을 꺼내셨어요." 엠블링이 회상했다. "천을 걷어내니 FA 컵이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10살밖에 안되었을 때 그것을 만져보라고 건네주셨죠."

그때까지 깁슨은 발작으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1948년 웸블리에서 열린 컵 결승전을 지켜볼 수 없었다. 하지만 팀이 런던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에게 트로피를 보여주기 위해 바로 깁슨의 집으로 찾아갔다.

깁슨은 전쟁이 끝나고 올드 트래포드를 재건설하는 것을 도와줬다. CREDIT : GETTY IMAGES

그의 아빠가 맨체스터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 섬유 산업에서 돈을 쓸어가던 사람 중 한명이었을 때, 깁슨은 14세의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또다른 성공한 사업가였던 삼촌 윌리엄 펠 아래에서 자란 깁슨은 이후 1차 세계 대전에서 군대에 제복을 공급하는 사업을 하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후 트램 운전사들과 버스 운전사들에게 유니폼을 공급하는 사업으로 확장하면서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채 경제불황에서 살아남았다.

유나이티드의 역사를 바꿨던 날은 1931년 12월 19일, 깁슨과 월터 크리크머의 만남이었다. 월터는 클럽의 비서였고 때때로 감독을 하기도 했으며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에서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 때 깁슨은 2000 파운드 (현재 환율로 118,000 파운드 = 약 1억 8000만원)을 클럽을 살리기 위해 기부했다. 당시 맨유는 빚이 계속 쌓여가고 있었고 선수들과 직원들에게 월급조차 지불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후 깁슨은 40,000 파운드 (지금의 2,360,000 파운드 = 약 35억원)을 더 기부했고 기존의 임원진이 사임하면서 본격적으로 클럽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포터들이 클럽을 계속 응원하길 애원했고 오래된 맨체스터 센트럴 역에서 운영을 안하던 미드랜드 기차 회사가 올드 트래포드에서 정차하도록 설득시켰고 직접 역을 만드는 것을 도와줬다.

"제 증삼촌(great uncle)은 항상 서포터들을 많이 존중했습니다 - 그는 팬들을 가장 먼저 생각했어요." 엠블링이 말했다. "그 당시에는 유니폼도 팔 수 없었고 TV 중계권료도 없었습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표를 파는 것 외에는 돈을 벌 수단이 하나도 없었죠. 그래서 그는 팬들을 가장 먼저 끌어모았습니다."

유나이티드는 깁슨의 지휘 아래 살아났다. 그는 1936년 맨유를 1부리그로 승격시켰지만 다음시즌 다시 강등되었다. 1945년에는 전쟁 후 클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버스비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버스비는 유나이티드가 유소년 정책을 기반으로 발전해야한다는 것에 가장 동의했던 후보자들 중 한명이었어요." 엠블링이 말했다. 

깁슨은 맷 버스비 경을 선임하기도 했다

깁슨은 또한 유나이티드를 사회의 중심으로 만들기 위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 클럽을 설립했다. MUJAC (Manchester United Junior Athletic Club)으로 알려져있던 그 팀은 처음에는 맨체스터의 소년들이 와서 축구를 하는 곳밖에 되지 않았고 촉망받는 유망주들이 유나이티드에 무조건 입단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1군에 와서 뛰는 것을 고려해달라"고 간간히 요청을 받을 뿐이었다. 결국, MUJAC는 1948년 FA컵 우승 스쿼드 중 6명의 선수들을 발굴해냈고 그 중에는 Johnny Carey와 Charlie Mitten이 있었다.

1939년, 깁슨은 Lower Broughton Road의 The Cliff 훈련장을 얻었고 그 훈련장은 60년 넘게 맨유의 핵심이 되어왔다. 그 곳에서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 데이비드 베컴이 나왔다. 버스비를 선임했을 뿐만 아니라 깁슨이 말년에 클럽에서 가장 잘했던 일은 정부에게 로비를 하여 올드 트래포드 재건축 허가를 받아내고 클럽이 전쟁에 대한 보상을 정부로부터 꼭 받도록 했다는 점이다.

깁슨과 릴리안은 난산(難産)과 질병으로 다섯 명의 아이들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한 명의 아들, 쌍둥이, 세 쌍둥이 중 두명의 아이를 그렇게 보내고 말았다. 1915년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 앨런 깁슨은 어렸을 때 폐렴에서 살아남아 1995년 죽을때까지 클럽의 부회장이자 단장으로 쭉 지냈다. 그는 1958년 2월 Red Star Belgrade와 유러피언 컵을 치르기 위해 원정을 떠나는 비행기에 타기로 되어있었으나 출국하기 며칠 전 발목이 부러져 갈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 Crickmer가 비행기에 탔다. 안타깝게도, 그 이후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The Cliff 훈련장은 라이언 긱스를 포함한 많은 스타들을 발굴해냈다. CREDIT : REX

앨런은 유나이티드의 첫 프리미어 리그 2회 우승을 지켜봤고, 알렉스 퍼거슨경이 그의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했다. 그 당시 클럽에 대한 깁슨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릴리안은 90대 중반의 나이에도 경기를 관람했으며 1971년 1월 죽을 때까지도 클럽에 대한 영향력이 꽤 컸다. 그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1970년대를 넘어갈 쯤, 앨런 깁슨은 자신의 지분 대부분을 클럽을 인수했던 루이스의 아들, 마틴 에드워드에게 매각했다.

올드 트래포드 터널에는 깁슨을 기리기 위한 명판이 하나 있고 구장으로 이어지는 다리에도 명판이 하나 있다. 월요일 열리는 기념식은 Trafford와 Salford 자치구들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행사다. 그의 업적은 너무나도 커서 정확히 그가 맨유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유나이티드가 얼마나 계속해서 성장할지와 상관없이 깁슨의 유산은 팬들이 꼭 기억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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