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재 지방 수의대 본과 1학년 재학중이다. 내가 어느 학교를 다니고 있는지는 이 글 (클릭) 에서 볼 수 있다. 내가 왜 수의대를 왔는지 대략적인 이유가 위 글에 있긴 하지만, 요즘따라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수의사로써 뭘 하고 살 것인지 고민이 많아 이제까지 내가 걸어온 길들, 경험한 것들을 쓰면서 나중에 수의대에 들어올 후배님들이 도움이 됐으면 해서 이 시리즈를 시작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번째, 내가 수의대를 선택한 이유다.
사실, 나는 내가 수의대에 올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정말 몰랐다. 애초에 수의대라는 존재 자체를 삼수가 끝나고 정시 컨설팅 받을 때 처음 알았다. 왜냐하면, 집에서 키워본 동물은 햄스터와 강아지 한마리였으며 햄스터는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은 것을 보고 어린 나이에 너무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못하다가 어느날 지켜보니 베란다 밖으로 떨어져서 집만 덩그러니 놓여져 있었다. 강아지 한마리는 할머니 말씀으로는 내가 그렇게 어리광을 부려서 친구분께 한마리 분양을 받았었는데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걸 보면 워낙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아직도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 기억나는데, 초등학생 때도 워낙 밤늦게까지 학원다니느라 바빠서 내가 산책시킨 기억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키웠는지 의문. 그러다 어느날, 강아지가 갑자기 사라져서 할머니께 여쭸더니 갑자기 죽었다고 한다. 짧았지만 동물병원도 한번도 가지 않았고 예방접종은 맞았는지 모르겠다. 거의 동물학대수준인데, 그 때부터 동물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 그 때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다른 아픈 친구들을 살려주라고 내가 수의대를 선택하도록 했나보다. 만약 내가 나중에 독립해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운다면, 절대 그 때처럼 키우지는 않을 것이다.
원래 나의 꿈은 어릴때부터 의사였다. 위 글을 읽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우리 가족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의사이시다. 할머니는 개원을 하셨고 나머지 세분은 모두 의대교수를 하셨거나 하고 계신다. 거기에 외가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내 또래들까지 (한명빼고) 모두 다 의사/치과의사, 혹은 의대생/치대생이다. 그만큼 우리 가족은 장손인 내가 의사가 되길 어릴 때부터 바랬고 전교1등을 밥먹듯이 했던 중학생때까지는 충분히 의대를 갈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다른 동네에서 온 친구들과 경쟁을 하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고 꿈과 성적의 괴리로 인해 내신과 모의고사 성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수시 지원을 해야하는 고3때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울만큼 의대를 가고 싶은데 성적이 너무 안좋아서 힘들었다. 결국 단기간에 성적을 올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하고 내가 평소에 가장 좋아했던 축구쪽으로 직업을 삼고자 K대 체대에 갔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군기, 졸업한 선배들의 실제 진로와 내가 생각했던 것이 많이 달라 한달만에 학교를 휴학하고 반수를 시작했다. 반수는 성적이 별로 변함이 없었고 서울에서 고모집에 얹혀 살며 삼수 끝에 지금 다니는 수의대에 오게 되었다.
삼수 때 수능성적이 내가 이제까지 살면서 본 모의고사, 수능 성적 중에 가장 좋은 성적이었기에 그만큼 선택지가 많았다. 정시 상담을 받으면서 어느 곳을 지원해야하는지 상담했는데 나와 고모는 의대쪽을 지원하길 원했지만 의대를 지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성적이라고, 대신 대체복무가 가능하며 6년제인 수의대를 추천하셨다. 그렇다. 이게 내가 수의대를 선택한 이유다.
남들보다 2년 늦게 대학교에 들어가다보니 군대에 가기 너무 싫었던게 당시의 나였다. 따라서, 의대처럼 장교나 민간인처럼 대체복무를 한다는 점이 가장 끌렸다. 또한, 의사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처럼 수의사는 동물의 생명을 살린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성적도 충분히 지방 수의대에 지원할만한 정도였고 그렇게 가군은 집 근처 지방사립의대, 나군은 지금 다니고 학교 수의대, 다군은 제주대 수의대를 썼다. 결과는 가군은 예비번호가 매우 뒤쪽인 불합격, 나군은 최초합, 다군 역시 예비가 돌고 돌아 추가합격이 되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나군에 있는 우리학교 수의대에 오게 되었다.
분명히 나뿐만 아니라 우리 동기들도 그렇고 후배들도 그렇고 전국에 있는 모든 수의대생들 중에 의대를 가려다가 못가서 수의대에 온 친구들이 많다. 실제로 내 주변 동기들이 그렇다. 정말 동물이 좋아서 수의대에 온 친구들은 의외로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수의대를 온 것에 매우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예과 1학년때는 사람 욕심이 끝이 없다고 운좋게 수학에서 찍은게 다 맞아 여기를 왔음에도 집에서도 반수를 조심스럽게 권하셔서 의대를 다시 지원할까 고민도 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수능 성적을 다시 받기에는 너무 두려웠고 다시 공부한다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다. 결국 나는 의대는 영원히 마음 속에 담아두고 대신 의대 생각이 다시는 나지 않도록 예과 생활을 정말 알차게, 바쁘게 보냈다. 내가 예과 때 무엇을 했는지는 다음 글에서 쓸 예정이다. 나처럼 의대를 생각하다가 수의대를 온 친구들이 나처럼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이야기가 잠깐 샜는데, 수의대 지원을 고민하는 수험생들, 혹은 수의사가 되고 싶어 수의대에 다시 오고 싶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봤으면 좋겠다.
내가 왜 수의대에 오고 싶은가?
나같은 경우는 앞서 말했듯이 군대 대체복무가 된다는 점, 6년제인 점, 졸업 후 소득도 의사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전문직이기 때문에 회사원보다는 낫다는 점 등으로 수의대를 선택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수의대를 선택했음에도 단지 이 이유때문에 수의대를 선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돈과 군대 대체복무만 보고 수의대에 오기에는 기대했던 것에 비해 실망스러운 것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특히, 수험생들은 자신의 선택 하나가 인생을 결정하기 때문에 더욱더 이 이유때문이라면 수의대에 오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보통 의대처럼 수능 성적이 높은 경우는 다 이유가 있다. 의대, 한의대, 치의대의 경우 졸업 후 진로가 정해져있으며 고정소득이 다른 일반 과에 비해 매우 높다. 수의대의 경우 요즘 폭발적인 입결 상승으로 인해 주목받고 있으나 내 생각에 이건 거품이 다소 낀 것으로 보인다. 보통 동물병원을 개원하면 '월 천만원'의 소득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정말 수의사마다 다르다. 애초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물병원을 운영하는 것은 수의사의 실력뿐만 아니라 경영능력도 중요하고 동물병원의 위치, 인테리어 등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물병원만 개원하면 월 천만원은 기본이지~' 이런 안일한 생각은 제발 버렸으면 좋겠다. 동물병원 개원율이 갈수록 높아지는 만큼 그만큼 폐업해서 수의직 공무원으로 가는 경우, 다른 병원의 페이닥터로 가는 경우도 많다. 나도 아직 수의대생이고 많은 분들을 만나보지 못했지만, 한마디로 잘된 수의사만 보고 나도 수의사가 되면 저렇게 벌겠지?와 같이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히려 공대를 나와 회사원으로 일하는 것이 수의사보다 더 많이 벌 수 있다.
또한, 군대 대체복무가 된다고 수의대를 선택하지 말자. 실제로 군대 복무 기간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2020년쯤에는 1년 6개월로 줄어드는 것이 확정이다. 18학번부터 대체복무 선발방식이 본과1,2학년 성적으로 바꼈지만 우리의 경우 수능 성적 수학 영어 평균 백분위 50% + 예과 학점 50% 이렇게 뽑았는데 우리 학번 남자들 중 11명 정도가 불합격되었다. 실제로 그 친구들은 군복무기간이 갈수록 단축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임상으로 갈 생각이 있는 친구들은 최대한 필드에 빨리 나가면 나갈수록 이득이므로 현역으로 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공중방역수의사로 가는 경우 흔히 생각하는 소동물 임상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방역쪽 일을 하기 때문에 나중에 동물병원 개원 생각이 있다면 오히려 현역으로 가는 것이 이득일지도 모른다.
특히, N수생, 장수생, 회사나 다른 과를 다니다가 수의대를 생각하고 싶은 분들은 정말 정말, 진지하게 수의대 지원을 고민해보길 바란다. 만약 아래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수의대에 지원해도 좋다.
1. 어릴 때부터 동물농장보고 수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정말 동물이 너무 좋아 수의사를 직업으로 삼지 않으면 절대 안되는 경우)
2. 야생동물이 너무 좋아 야생동물 전문 수의사가 되고 싶어요! (수의사의 전문성을 살리고 싶은 경우 - 야생동물)
3. 원헬스 (One Health : 인간 - 동물 - 자연이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뜻으로, 최근 인수공통전염병의 중요성이 나날이 높아짐에 따라 원헬스가 주목받고 있다) 에 관해 관심이 있어요! (수의사의 전문성을 살리고 싶은 경우 - 비임상, 기초, 전염병 등)
4. 그냥 돈은 적당히 먹고 살만큼만 벌어도 괜찮아요 (수의대의 높은 입결이 미래의 소득과는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는 경우)
5. 제가 중학교 때, 개구리 해부를 하면서 실험동물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유기견 봉사를 하기도 했고, 이랬고, 저랬고, 등등.... 이래서 수의사가 하고 싶습니다. (예전부터 수의사를 생각하고 있었고 수의사의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며 수의사가 되고 싶은 확고한 동기가 있는 경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평생 먹고 살기 위해 할 일인데 그저 전문직이기 때문에 수의대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지하게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실제로 미국에서도 자살률이 가장 높은 직업 중 하나가 수의사다. 아무리 선진국인 미국이라도 수의사의 소득은 의사의 절반이다. 왜냐고? 사람이 아닌 동물을 다루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진로를 경험해보고 졸업한 후에 결정할 예정이다. 만약, 나처럼 그냥 들어왔다면 수의대를 다니면서 진지하게 수의사로 성공하기 위해 다양한 진로를 경험해봤으면 좋겠다. 동물이 좋아 수의대에 들어왔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남들보다 더 만족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수의사로써 성공할 확률이 훨씬 더 높다. 앞으로도 정말 동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수의대에 들어왔으면 좋겠다.
* 수의대 생활에 궁금한게 있으면 언제든지 댓글로 물어봐주세요! 특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아 어디를 지원해야할지 모르겠는 수험생들, 수의대를 지원할까말까 고민중인 수험생분들, 저도 삼수를 해봤고 똑같은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그 마음 잘 압니다. 솔직하게 말씀해주시고 물어보시면 최대한 빠르게 답변해드려요!